코따까리들 (단상)

전화 통화의 유용한 사용법

koddaggari 2013. 8. 17. 17:25


 군대 있을 때에는 공중전화부스 앞에서 오래도록 줄을 서기도 했어. 얼굴에 걸레를 맞는 한이 있어도 통화를 포기하지 않았지. 그 때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어. 이런 식의 연락은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전화는 본연의 그리움을 해소해주지 않잖아. 그래서 전화통화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병, 병장이 되고부터는 편지가 쓰여지지 않더라고. 할 말을 다 해버려서라기보다는, 흩어져버린 감정 때문이었어. 그리움의 감정이 단전, 가슴에 잔뜩 모여야 한 글자씩 여무는데, 전화로 그리움의 감정들이 이리저리 해쳐져버리니 글도 흩어지더라고.

 부모님에게도, 나는 특별히 연락을 잘 안드리는 타입이야. 특별히 사랑받는 막내아들인데도 말야. 물론 만날 때 행복하게 넘쳐흐르는 교감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통화를 억제한다거나 하는 건 아냐. 그냥, 그 정도의 그리움이야 추운 겨울 자박자박하게 피워둔 모닥불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펴내는데 유용하니까. 부모님이 들으면 참 섭섭하시겠지. 아직 아이가 없어서 이런 소릴 잘도 지껄이는 거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역시 흩어버리지 않고 단전 아래 모아두고 있는 쪽이 더 좋은 거 같아.

 그러니까, 전화 통화를 전혀 즐기지 않는 타입이라고 해야하나. 전화통화라는 게 굉장한 기술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이잖아. 태도, 감정, 맥락보다는 말 자체에 의지하는 비중이 높단 얘기지. 신방과에서는 이런 걸 진지하게 배우기도 하는데,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중에서 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내용은 비언어적인 쪽이래. 맞는 말이잖아. 자칫 민감한 얘기가 오고가다가 "괜찮아. 화 안났어. 더 얘기해봐." 같은 반응이 나와버리면,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중요한 정보들을 알 수 있는 루트는 차단당한 채, 열심히 주변부를 파헤치고 들어간다고. 그러다 '뻥!' 하고 지뢰가 터지는 거지. 전화는 기본적으로 감정교류보다는 정보전달의 용도로 사용해라, 가족이나 연인과 전화할 때는 의식적으로 기분좋은 이야기만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기분상할 만한 소지가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기면 직접 찾아가거나 문자나 메일을 이용하라,는 정도의 매너들은 서른이 되기 전엔 반드시 알아야 해.

 서른이 되니까 자격이라도 주어진 것처럼, 요즈음은 전화의 새로운 용법을 깨치고 있어, 역발상이라고나 할까. 애초에 성격이 감정을 드러내는 타입이 아닌데다가, 살아가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좌절과 실망, 이별들을 겪으면서 지금의 나는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이야. 여간한 일로는 마음의 평정을 깨트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정도의 느낌. 딱히 나쁘다고 생각진 않아. 평화주의의 선한 이미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들이 장기적인 손익을 따져봤을 때 밑지는 느낌은 아니더라고. 게다가 사회 초년생이란 그저 굽신굽신한 게 미덕이잖아. 하지만 그것도 슬슬 애매해지는 시기가 되면 의식적으로라도 화를 내야 할 상황이 생기더라고. 그건 나같은 사람에겐 정말로 고역이다. 중요하다고 해봐야 '니가 할래 내가 할까?' 정도의 사소한 건수로, 안다고 해봐야 몇 일 몇 달 봤을 뿐인 사람들과 감정 상해가며 언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독히 감정소모적인 일이야..

 바로 이런 용도로 전화 통화가 참 유용하더라고. 면전에다 화를 내는 것보다 감정소모가 덜하면서 목소리의 톤을 높이는 정도 만으로도 '화가 났다'는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니까 말이야. 비언어적 루트가 차단된 답답함, 억울함 같은 게 섞여들면서, 실제로 화가 더 나고 감정이 증폭되기도 하는 것 같아. 그렇게 할 말을 다 쏟아내고 나면 고른 호흡과 톤으로 돌아와 '다 잘해보자고 하는 일이다. 이렇게 풀고 다시 잘해보자'고 말하는 걸 잊어서는 안돼. 다음에 만날 때 어색하지 않으려면 말야. 절정에서 결말로 뚝 떨어지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마무리를 잘 하고 나면, 전화통화로 언성높여 다퉜던 일이 마치 게임이나 영화같은 가상 공간에서 있었던 일인마냥 돼버리는 거지.

 그래도, 역시, 싸운다는 건 참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