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녀도 쿨가이도 싫어
'철벽녀', '철벽남'이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철벽 안에 지키고 있는 게 도대체 뭘까요? 굳이 철벽을 깨부수고 싶은 마음도 안들어서 확인은 안했는데, 뭐 별거 있을까, 싶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도 아니고 철벽씩이나 둔다는 데, 이미 김이 팍 새버립니다. 사심없이 이야기나 하자고 말을 걸었는데, 이 짐승이 얻다대고 덤벼드나, 하는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면 정말 난처합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이미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뺀다구요. 이런 제길, 당신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닌데, '너 따위에게 관심없다'는 확실한 의사를 미리 확인하게 되는 거, 그거 그리 유쾌하지 않아요.
아, 뭐 그렇다고 내가 여기저기 보이는 여자들에게 시덥지 않게 몇 마디씩 던져보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나도 꽤 점잖은 편이라, 서로 말을 안하고 있는 것보다 서로 어색한 인사라도 나누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때에나 겨우 말을 붙여보는 거랍니다. 여행지, 같은 숙소에 묶으며 밥상머리를 같이 하고 있다거나, 동호회, MT 등의 모임 후 뒷풀이 장소에서 한 테이블에 앉게 됐다거나, 그럴 때 말입니다. 사람 만나러 온 거 잖아요. 그거 아세요? 차라리 혼자 있는 분들은 철벽같은 거 없이 쿨하답니다. 꼭 동성 친구를 옆에 달고 있거나, 내 쪽에서도 나 혼자가 아니라면,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뺍니다. 나는 장풍 쏠 줄 모르는데요. 아마도, 철벽 안에서 지키고 있는 뭔가는 '외부의 시선'에 취약한가 봅니다. 어쩌면 '난 그런 헤픈 여자가 아니야', '난 그런 속물이 아니올시다', 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구요.
또 반대로, 지나친 '쿨 가이', '쿨 걸'들이 있습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다는, 후리한 라이프 스타일! '어장관리'가 아니냐, '나쁜 남자'가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합니다만, 당사자들은 관심없죠. 뒤돌아보면 '잘가~'하고 손을 흔들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특히 남성과 여성 사이에, 그래도 이 '선'은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암묵적 합의를 마련하는데 지나치게 비협조적인 것도 문제입니다. 상대는 이 선을 넘다니, 이 액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놀리듯이 그 선을 쉭쉭 넘어다니면 실례지요. 오해의 여지를 제공하잖아요. 욕 먹어도 할 말 없습니다.
오늘 만난 친구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은 이성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빈의 한인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그 때 8명이 함께 자는 방에서, 침대와 바닥 사이의 공간에 발을 끼워놓고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여자 방에 자리가 모자라 남자 방에서 잔다고 하더라구요. 남동생이 함께 있어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우선 철벽녀는 아니구나, 했죠. 우리는 빈에 출장 온 코레일 관계자 아저씨들과 함께 도나우 강에서 립도 먹고, 도나우 타워에서 비엔나 커피도 마셨습니다. 나중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만나, 퐁네프 다리에 신문지를 깔고 마트에서 사 온 4유로 짜리 와인을 마시며 비를 맞기도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순수한 만남과, 함께 해서 즐거운 시간들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철벽을 쌓았다면 저 추억들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내게는, 주변에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낌새를 차리면, 괜히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제는 좀 자제해야겠습니다. 최근에 한 친구가 제 말 듣고 고백했다가 시원하게 거절당했어요. 아무래도 어장관리를 당한 게 아닌가 합니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 지 배려하지 않은 액션들이 많았어요, 내가 보기엔. 오늘 만난 친구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주가는 한의원의 의사가 지나치게 친절하다는데요. 이런 저런 할인을 물론이고, 진료 시간에 시시콜콜한 개인사들을 쉴새없이 물어보고, 한달 전부터 아침을 못 먹으니 진료받으러 올 때마다 삼각김밥을 좀 사다달라고 부탁한답니다. 직접 전화해서 언제 올 거냐, 이 시간이 제일 한적하다 말해주구요. 누가 들어도 이건 한의사가 환자를 좋아한다는 드라마인데, 한 번씩 핵심을 찔러보면, 애매한 대답들로 살짝살짝 피해간다는 거에요. 친절을 빙자한 어장관리인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복잡했습니다.
이 친구는 철벽이나 어장관리 같은 거 없이 순수하게 사람과 사람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인데, 나중에 괜히 상처받는 거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어찌보면 단순한 일인데, 왜 이렇게 배배 꼬아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건지. 나는 언제나, 지나치게 틀어막거나 무례하게 풀어헤치지 않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승부하는 이들의 편인데, 외견상 손해보는 쪽은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영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2009)>의 '지지'(제니퍼 굿윈 분)가 떠오릅니다. 매번 소개팅에 실패하다가도 결국에는 연애 100단인 '알렉스'를 꼬셔낸 것처럼, 이런 이들이 결국은 좋은 사람을 만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