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따까리들 (단상)

소박한 저녁밥상

koddaggari 2011. 8. 9. 04:10

"지금 뭐 하고 있었어요." 후카에리는 덴고의 질문을 무시하고 물었다.
"저녁밥 하고 있었어."
"어떤 거."
"나 혼자라서 별거 없어. 말린 꼬치고기 좀 굽고, 무는 강판에 갈고. 파 넣은 조개 된장국 끓여서 두부하고 함께 먹을 거야. 오이하고 미역 초무침도 하지. 그다음은 밥하고 배추절임. 그거뿐이야."
"맛있겠다."
"그런가? 특별히 맛있다고 할 정도의 메뉴는 아냐. 항상 거의 비슷한 것만 먹고 있어." 덴고는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문학동네. 1권 162~163p.


덴고는 쌀을 씻어 안쳐 전기밥솥의 스위치를 켜고, 밥이 되는 동안에 미역과 파를 넣은 된장국을 끓이고, 말린 전갱이를 굽고, 두부를 냉장고에서 꺼내 생강 고명을 얹었다. 무를 갈았다. 남아 있던 데친 야채를 냄비에 다시 데웠다. 거기에 무청절임과 매실 장아찌를 곁들였다. 큼직한 덴고가 왔다갔다하자 작고 좁은 주방은 더욱 좁고 작아 보였다. 하지만 덴고 자신은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거기에 자신을 대충 맞춰가는 생활에 오래도록 익숙해져 있었다.
...(중략)...
"당신은 요리하는 게 몸에 뱄어요."
"오래도록 혼자 살았거든. 혼자서 잽싸게 밥을 차리고 혼자서 잽싸게 먹어. 그게 습관이 됐어."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문학동네. 2권. 308p.
 



초짜들이 요리 한 번 해보겠답시고 달려들면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봉골레 스파게티, 호주산 스테이크에 와인 한 병 따거나,
안동찜닭을 안치고 잡채를 버무린다. 
어떤 날은 왁자하게 삼겹살, 목살에 수제 소시지까지 구워낸다.
특별히 맛있다고 할 정도의 메뉴.

어머니가 다녀가신 후 덩그러니 남겨진 된장찌개는
비싼 '재료발'이나 '소스발', 거창한 요리를 하겠다는 '허세'없이도
그 자체로 완.벽.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며느리도 안가르쳐준다는 장맛의 비밀을 어머니도 깨친 겐가, 했더니
마트에서 사온 <다담> 된장과 호박, 조개만으로도
어머니의 된장맛이 났다. 장맛의 비밀을 왜 며느리가 알 수 없는지 알 것 같았다.
후에 똑같은 재료와 똑같은 방법으로 홀로 된장찌개맛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나,
미세한 재료의 양 조절, 소스가 들어갈 절묘한 타이밍, 섬세한 불 조절 등
비밀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 우주만큼 넓다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할머니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모 할머니를 잠깐 뵈러 시골에 갔었다.
여든에 가까운 연세로 시골에 혼자 사시는 이모 할머니는,
9시가 넘은 시각에 찾아온 조카 손주들에게 저녁상을 내오셨다.
지독히 배가 고팠는데 밥상에는 고기 한 점 없었다.
김치, 김치, 이름을 알 수 없는 김치, 그리고 저기 저 쪽에 있는 것도 알고보니 김치.
할머니가 다시 쟁반에 무얼 담아 내오시는데, 이번엔 필시 메인메뉴로구나, 했지만
그것은 상추였다. 엄청난 양의 상추를, 할머니는 어두운 밭에 나가 급히 따오셨다.
실망한 내색을 할 겨를도 없이 상추쌈을 막장만 발라 먹었는데, 그 상추쌈도
그 자체로 완.벽.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장맛의 비밀에 관한 진실이 다시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군 복무 시절 짬밥을 버리며 다짐했다. 하루 한 끼는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자.
내가 복무하던 시절만 해도 맛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질좋은 짬밥이었지만,
갈굼으로 다져진 취사병 아저씨들의 손 끝에 정성이 담기길 바라는 것은 여전히 무리였다.
나는 '정성'이, 내가 한 끼 식사에서 찾고자 하는 본질,
말하자면, 음식의 '영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사는 남자는 오늘도 고민한다. '대체 무얼 먹어야 하나?'
거금을 들여 제대로된 요리를 먹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
나는 그것이 '정성'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도,
심지어 내가 직접 정성을 들여 해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소박한 저녁밥상.
항상 거의 비슷한, 특별히 맛있다고 할 정도의 메뉴가 아닌,
내 손, 내 입, 내 생활에 익숙한 저녁밥상.
요리가 아니라 저녁밥상.
어쩌면 내가 가장 먹고 싶은 것은 이런 소박한 저녁밥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