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따까리들 (단상)

아들의 공식적 입장 표명

koddaggari 2011. 8. 10. 23:54

"죄송해요. 아버지. 갑자기 채용 공고가 떠서... 제사에 참석 못할 것 같아요."
말하는 태도와 관계없이, 그건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의 취약한 부분을 찔러 반격을 허용치 않는 기습공격. 고통의 신음처럼 섭섭한 기색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늘,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공부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건 알고보면, 스믈스믈 고개를 쳐드는 섭섭함을 잠재우는 주문 같은 거다. 나는 약점을 정확히 겨냥해 찌른 것이다. 내 각본과 한 치의 오차도 없어서, 전화를 끊고 나는 슬퍼졌다.

하지만 내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빠서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던 매형이, 제사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연락이 왔다. 제사 다음날 아버지 댁 근처에 볼 일이 있기도 한 사정은 말해지지 않았다. 내심 허전하고 쓸쓸한 제사를 걱정하시던 아버지는 아마도 조금은 반가워하셨겠지, 하고 내 마음도 약간은 따뜻해졌다. 제사 한 시간 전에 아버지께 다시 전화했다. 전화할 염치도 없지만 전화조차 하지 않을 권리는 더더욱 없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로 쓸쓸함을 상기시키기 싫었지만, 아버지가 무관심한 아들을 가져 슬퍼지는 것은 더 싫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쓸쓸한 제사겠네요...매형은 왔어요? 오늘 간다고 들었는데.."
매형은 제사 다음날의 용무가 취소되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매형에게 화가 났다. 사실 매형에게는 제사에 참석할 의무가 없는 것이라 나보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도, 나는 아버지의 섭섭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물어가던 아버지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다, 애초에 내가 찌른 상처다.

매형에게도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겠다.

용무가 취소돼서 가지 않는다는 것 역시 '공식적 표명'의 냄새가 났다.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그토록 매정하지는 않다는 것까지 우리는 알고 있다. 갑자기 채용이 뜨고 내일의 용무가 취소돼도 무리해서라도 제사에 참석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가뜩이나 '작아진 목소리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작아지는 것 같다. 마이크 음성으로 울려퍼지는 자식들의 공식적 표명 앞에서.

얼마나 잔인한가, 아들의 공식적 입장 표명이란. 이면에 비공식적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면서도 모르는 채 한다. 자식들의 핑계거리는 점차 다양하고 단호해지는 반면, 아버지의 대답들은 점차 하나로 소급된다. 나이든 아버지는 공식적 표명과 비공식적 입장이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가족 모두를 숨죽이게 하던 아버지의 마음에 없는 공식적 표명이 조금은 그립기도 하다. 그게 참 싫었었는데... 모두가 함께 나이를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