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좋아하세요? (리뷰)
[영화]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윤기 연출. (2011)
koddaggari
2011. 10. 3. 01:25
조금 지루하긴 했다. 이 무렵 보내고도 잡지 못해 안타까웠던 기억, 마음, 불안 하나쯤 가지지 못한 이들은 쉽게 빠져들지 못한다. 내게도 사랑이 떠나갈 때 그토록 아프고도 말을 삼켜야 했던 기억이 있는데, 4년이 지났더니... 영화를 보다가 그만 잠들고 말았다. 4년 전 그 무렵이었다면 가슴을 끊어놓았을 영화인데. 그래서 '지루함'으로 영화를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애초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면 연출이 지루하다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잔잔하게 가슴 먹먹해져가는 이야기다. 구석에 숨은 고양이의 얼굴처럼, 잠깐 내비쳤다 금새 사라져버리는 가슴 깊숙한 감정들은, 시끌벅적 흥미진진한 사건들 사이에서는 흔적도 없이 묻혀버릴 것이다. 떨어진 담뱃재, 갑자기 끊어진 빗소리, 천천한 발소리, 따뜻해졌다가 다시 차가워지는 조명과 같은 것들에 오감이 반응할 정도로 지루해야 겨우겨우 내 가슴도 함께 먹먹해진다.
11시가 넘어 감자튀김에 맥주 한 캔 뜯어놓고 봤더니, 절반쯤 보다 잠들었다. 50분 가까이 봤는데도 '아, 집 정말 좋다.', '현빈 진짜 멋있다. 저런 사람이 군대에서 썩어야 한다니..', '대사가 지나치게 문어체인데? 의도된 건가?', '영신(임수정 분)에게 정말로 딴 남자가 있는 걸까, 거짓말일까?' 정도 생각이 들 뿐, 별다른 사건이 없다. '지석'(현빈 분)과 '영신'이 50분 내내 '누가누가 더 오래 참나' 경합을 벌이고 있다. 아니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석와 영신과 '관객들'. 맥주에 배부른 한 관객은 영화를 이탈해 잠들고 말았다. 잠결에 언뜻 이런 대사를 들은 것 같다.
"참 나이스 해 당신. .... 화내도 돼... 그래서, 그게 왠지 마음에 걸려서 바람난 와이프 짐 싸는 거 도와주고, 근사한 식당가서 마지막 저녁식사 같이하면서 나이스한 모습 남기고 싶은거야?..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건 줄 모르지 당신?"
꿈과 의식의 경계에서, 얼마 전에 꼭 이런 식으로 여자친구와 다투었던 기억이 났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소리치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끝까지 배려했었는데... 배려하는 모습이 그녀를 더 화나게 하고 말았다. 꿈에서 임수정이 현빈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넌 아직도 이성적일 수 있어서 좋겠다. 나는 미성숙해서 이렇게 화가 나. 화가 나는 걸 어떡해? 왜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현빈은, '네가 하루종일 피곤했을 것 같아서, 좀 참았다가 내일 이야기하려는 것 뿐이야. 지금 나도 같이 화낸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라고 쭈그려 앉아 혼잣말을 했다. (꿈에서는 부끄럽게도 현빈이 내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깼더니 아침이었다. 그녀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 아파트에 잠깐 주차해뒀었는데, 오늘 거기 시장이 선다네.. 관리소에서 전화가 왔어. 미안한데 네가 차 좀 빼 줄래? 지금 회사에서 나갈 수가 없어서 그래."
그러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는데, 내게 차 키가 없었다.
"차 키는? 경비실에 있어?"
"아... 내가 안 맡기고 왔나? 엇.. 내 가방에 있네.. 진짜 미안한데 시청역으로 좀 와줄래?"
그녀는 바빠 보였다. 나는 바쁘지 않았다.
세수도 못하고 대충 옷만 걸쳐입고 나와 지하철을 탔다. 시청 역까지 가는 기분이 이상했다. 책이라도 들고 올 걸. 생각은 자연히, 모두에게 번거로운 이른 아침의 실책에 대해 책임귀인을 하고 있었다. 기분은 이상한데, 결국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굳이 따져본다면, 지하주차장이 없는 구식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내 처지가 문제였다. 나는 언제부턴가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아, 그러고보니 어젯밤 영화에서 '영신'이 그런 말도 했지....
"난 이제 정말 모르겠거든. 당신이 처음부터 화를 못 내는 사람인지, 아니면 화가 나도 정말 잘 참을 수 있는 사람인지.."
나도 처음부터 화를 못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된 것은, 4년 전에 '이별'을 경험하고 난 후부터다.
지석의 마음이 어떤건지 알 것 같다. 지석도 아마 처음부터 화를 못 내는 사람은 아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영혼이 지르는 단발마 같은 것이다. 영혼이 상처입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읔'하고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같은 것. 하지만 깊은 아픔이 새겨진 가슴은 웬만한 아픔들로 아프지 않다. 무언가가 찌르고 들어오지만,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아프지는 않다. 피는 새어나오는데 아프지 않다. 그래서 기분은 이상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는다. 휴지를 찾아 조용히 피를 닦는다. 그리고 아파하는 눈 앞의 다른 영혼을 달랜다. 아프지 않을 뿐 피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회사 앞에서, 키를 받고, 아침 식사에 대해 묻고, 괜찮다고 손을 흔들고,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하며, 나는 끝까지 나이스했다. 그래도 그녀의 표정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전화가 왔다.
"XXXX 번 차 차주 되시나요? 어디쯤 오고 계세요?"
"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거의 다 와가요. 5분이면 갑니다."
"네... 지금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빨리 와주세요.."
그러고보니 나도 미안해야 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장이 서는 곳으로 뛰어갔다. 아파트에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아파트 내부에 장이 선다. 길가에 길게 천막이 쳐 있는 가운데 여자친구의 차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부부가 천막을 치지 못하고 박스 위에 앉아 있었다. 한 시간은 가만 앉아 있었던 게다. 지나가는 손님들이, 누가 차를 이렇게 대놨냐고 혀를 끌끌 차는데, 막상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 빼는 것을 도와주었다.
"여기 긁히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대로 한참 뺐다가 핸들 돌리셔야 해요."
그들의 친절함에, 나는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얼른 차를 빼는 것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차를 대놓고 올라왔는데, 문자가 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무슨 생고생이야.... 아저씨가 막 화내?)
(아니.. 화를 안 내셔.. 그래서 더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르겠어....)
(ㅋㅋㅋㅋㅋㅋㅋ)
그때서야, 그녀가 그렇게 웃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건 줄 모르지 당신?"이라고 말한 영신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바쁘지 않다. 아침을 먹으면서, 다시 영화를 이어서 본다. 영신의 감정에, 지석의 감정에 곧장 빠져들고 싶다. 영신과 지석은 다시 영혼을 추스려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 피를 흘리면서, 서로의 피를 닦아주면서, 화는 내지 않고 있다. 영신에게는 정말로 다른 남자가 있었다. 이별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지석이 혼자서 조용히 새어나오는 피를 닦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그런 대사는 없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은 철저히 금기시되는 주제다. 영신과 지석은 서로에 대한 관심도,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살가운 대화도 없어져버린, 그렇게 물기없이 말라비틀어진 사이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코 앞에 두고서도 온화하고 부드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정작 '사랑'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커녕 이야기가 자칫 '감정' 쪽으로라도 갈라치면 스스로 놀라 이야기를 돌려버린다. 가슴 한 구석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사랑...., 하지만 언제부턴가 너무도 깊숙히 숨어버린 사랑이라 서둘러 뛰어가 인공호흡이라도 해 볼 수가 없다. "사랑한다"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라도 한 번 툭하고 던져진다면, 호흡이 끊어져가던 사랑이 금새 바닷물을 토해내고 온 몸으로 큰 호흡을 할 것만 같은데.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결벽증이었다. 의미를 알고 싶어 한참을 헤매 다녔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사랑은 어느 순간 툭하고 알게 되는 것이었다. 내게 그 순간은, 처음 '이별'을 알았을 때였다. 이별 후에야 사랑은 완성된다. 말하자면 '사랑한다'는 말은 틀렸다, '사랑했다' 고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부터 나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사랑한다'는 말의 운명은 대충 그러한 것이다, 정말로 너무나 사랑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틀렸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내어 말해볼 수 있는 것이다.
4년이 흐른 뒤 '사랑한다'는 말도 식상해져서, 요즘 나는 되려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미안하지만 난 사랑 안해."
그러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뭐, 괜찮아."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그녀는 안다, 내가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완전히 사랑하지 못할 때에 필요한 것이다.
영신이든 지석이든 한 번 크게 소리지르고, 정신없이 화를 내고 '사랑'에 대해, 서로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영화는 그들이 그러지 못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고 있나? 이 이야기에 이별을 돌이킬 수 있는 어떤 '순간'이란 게 있었을까? 아니다.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한다'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에게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죽어버린 말이다. '누가 누구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거나, '누구는 겉으로는 친절해도 결국은 사랑하지 않는다'와 같은 추측들도 이미 의미가 없다. 벌써 죽어버린 순간이다. 일은 그렇게 이미 흘러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벌써 그렇게 돼버렸다.
영신도 지석도 서로를 사랑했다. 이별 후에, 그들의 가슴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고양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지독히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헤어지게 됐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 해?'와 같은 생각이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것마저 그들은 알고 있다. 사랑했다고 해서 헤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살다보면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지나고보면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그런 사랑 하나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나.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있다는 것마저 그들은 알고 있다. 영신은 그래서 이렇게 되뇌는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
화를 내지 않는다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파하지 못한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했지만 살다보면 헤어져야 하기도 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마저 알기에 영혼이 아파도 웃어야 한다. 병신같이 보여도 화를 낼 수 없다. 사랑했지만 헤어져야 하는 일,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안타까운 이별이란, 이처럼 지루한 일이다. 찔러도 비명소리 없고, 슬퍼도 울지 못하고, 병신같아 보여도 웃을 수 없는... 마치 하루종일 내리는 비처럼, 이 영화처럼 늘 한결같은, 아, 그래서 너무도 지루한 일.... 돌이킬 수 없는 이별, 그 지루한 일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