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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발췌)

자기 안의 새로운 원천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 안에 새로운 원천 같은 게 생겨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 많은 물이 샘솟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바위 틈새의 자그마한 샘이다. 하지만 소량이라 해도 물은 끊일 새 없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서두를 건 없다. 초조해할 것 없다. 그것이 바위의 움푹한 곳에 가득 고이기를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물이 고이면 그것을 손으로 떠올릴 수 있다. 그다음에는 책상을 마주하고, 떠올린 것을 문장의 형태로 만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무라카미 하루키. <1Q84>. 문학동네. 1권. 422p


처음 만날 때, 오늘도 내일도 편지를 쓰고, 오전에도 오후에도 저녁에도 전화를 했지만 또 할 말이 있었다. 끝도 없이 말을 했는데 내용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은 쾌락의 신음소리거나, 감정이란 악기의 연주, 의미를 알 수 없는 흥얼거림에 더 가까웠다. 마음에서는 고갈되지 않는 우물물처럼 끊임없이 무언가가 솟아나왔고 나는 그것을 입김으로라도 뱉어내야 했다. 말로 부족하다 느낄 때는, 유치하지만 보기싫지 않은, 그런 글들을 써내려가야 했다. 그런 때가 있다.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은, 또한 그렇지 않은 때가 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편지를 쓸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사랑하느냐, 마음이 식었느냐, 열정이 사그라들었느냐와는 다른 이야기다. 마음 속에서 솟아나오는 무언가, 아직 적당한 형태를 갖지 못한 무언가, 말이든 글이든 표정이든 행동이든 어떤 매체로든 표현되기를 기다리는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기에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편지가 써지지 않을 때, 나는 전화로 나누는 이야기들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언가'가 전화로 나누는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로 형태지어지고 나면, 글로 표현돼야 할 여분이 남지 않는 느낌이었다, 쌀독에 바닥이 드러난 것처럼. 말보다 글을 편애한 탓이었지만, 문제의 핵심은 '무언가'의 절대량이 줄어버린 데 있었다. 그것은 무한대로 퍼올릴 수 있는 원천은 아니었다. 

나는 특별히, 일기가 잘 써지는 시기가 있다. 한동안 쉬고 있던 일기를 오랜만에 써내려갈 때, 마치 그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 '무언가'를 꺼내어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음속에 형태지어지길 바라는 '무언가'는 펑펑 쏟아져나오지는 않아도, 매일 조금씩 퐁퐁퐁 생겨난다. 그런 점에서 '무언가'의 절대량이 줄어버렸다는 것은 오해였다. 그보다는 저축해둔 것들을 다 써버린 것. 사랑에 빠졌을 때는 이 우물물의 펌핑이 두근두근 요란해져 밑에서부터 '무언가'가 끊임없이 치고 나오다보니, 마치 구토하듯 기존에 저축해둔 것들까지 다 밀려 올라온 것. 마음 속 '무언가'를 잘 관리하는 것이 '작가'라는 사람들의 주업무다.

6개월간 여행하며 쌓아둔 '무언가'를 세상에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었다. 말로 흩어버리기보다 매일밤 글을 쓰고 싶어서, 사람들로 북적대는 '프랑스길(북쪽길)'보다 한적하기로 유명한 '은의길'을 택했다. 순례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부터, 걷고 쓰고 걷고 쓰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떤 날은 대여섯 페이지를 순식간에 써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날, 그렇게 휘갈겨진 부분들은 어김없이 지워졌다. 반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가,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분량이었다. '무언가'를 작품이라 할 만한 형태로 정제하는 일은, 쌓아둔 냉동재료들을 잔뜩 꺼내서 순식간에 해동시키고는 뚝딱하고 대량의 요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아주 싱싱한 최상급의 횟감, 방금 밭에서 따온 채소, 막 솟아나온 샘물, 오늘 새벽 풀잎 끝에 맺힌 이슬들을 모아 극소량의 아름다움을 요리하는 일이었다. 냉동된 '무언가'는 이런 코따까리들로 쓰기에는 적합해도, 작품으로서는 아니올시다, 였다.

덴고의, 하루키의 마음 속에도 '무언가'가 있었구나, 하고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소량이라 해도 물은 끊일 새 없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서두를 건 없다. 초조해할 것 없다. 그것이 바위의 움푹한 곳에 가득 고이기를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물이 고이면 그것을 손으로 떠올릴 수 있다" 일상에 지친 마음은 펌핑이 시들시들해서 하루 반 페이지 분량의 '무언가'를 끌어내기도 쉽지 않다. '무언가'를 잘 관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일상의 방해를 최소화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일정하게 흘러나오는 '무언가'의 밑에 손바닥을 오므리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매일 그만큼의 살아있는 글을 써내려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