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상

감옥 나는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다. 진지한 척, 아는 척, 수많은 ‘척’들로 범벅이 된 글을 보면 저절로 욕이 나온다. 댓글로 푸지게 욕을 쓸 때의 쾌감을 사랑한다. 아무 의미없는 내 욕설에 반응하는, 인간인 ‘척’ 하는 놈들이 있으면 감사하다. 그럴 때는 전율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 전략은 간단하다. 우선, 감정적인 욕설 공격으로 놈을 분노케 한다. 놈이 화를 못 이겨 인간성의 바닥을 허우적댄다 싶으면, 이제 논리로 공격할 차례다. 나는 변호사다. 승률 90%를 자랑하는 스타 변호사. 터질 듯 달아오른 원자로에 냉각수를 붓는 일은, 내 전문 분야다. 논리 공격 10분이면, 놈은 지성의 바닥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자신의 무식과 만난다, 마치 처음 본다는 듯. 논리적인 공격에 화가 누그러지.. 더보기
가면 고아원에서 살인이 일어났다. 희생자는 11살짜리 고아 여자아이. CCTV에 토막 살해 현장이 그대로 담겼다. 하지만 범인은 태연하다.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CCTV의 위치를 알고 있다. 범인은 절차가 옮겨질 때마다 한 번씩 CCTV를 바라본다. 가면은 울고 있다. 울고 있는 표정의 각시탈. 수사를 맡은 형사는 이미 마음 속에 용의자를 두고 있다. A씨는 고아원에서 5년째 아르바이트를 해오던 학생. A씨는 주말마다 캐릭터 코스튬을 입고 나타나 아이들과 하루종일 놀아주는 일을 한다. 문제는 A씨의 인상이 너무 좋다는데 있다. A씨는 기본적으로 웃는 얼굴에 처진 눈, 동글동글한 인상이라 누가봐도 ‘좋은 사람’이다. 특히 눈이 작고 길어서 웃을 때 눈썹과 함께 호를 그리며 아래로 처지는 눈웃음은 .. 더보기
서울역에 내렸다 서울역에 내렸다. 장병 휴가는 짧다 못해 허무하다. 개미 새끼들처럼 방향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개워냈다. 서울역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씹어 먹으며 지나가는 여자를 구경한다.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질질 끄는 것밖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 시간이 닥쳐올수록, 휴가를 맞이해 정성껏 닦은 군화는 바닥과의 마찰력을 높인다. 서울역에 내렸다. 분주히 짐을 챙겨 움직이는 승객들의 활기, 세 시간만에 온 몸으로 받아내는 햇살, 힘이 난다. 가슴이 벅차 오른다. 차례를 기다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기가 답답할 정도다. 계단으로 뛰어 오른다. 가슴이 벅찬 만큼 심장을 뛰게 한다, 조금은 살 것 같다. 지금 여기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서울, 꿈을 타고 날아서가 아니라면 이 곳을 떠날 일은 없다. .. 더보기
무인도에 표류되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구나.’ 절대적 패배감. 되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이 들었다. 달콤한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내 몸을 실은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고 있었다. 주위의 공포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 내게도 추락할 곳이 남아 있었구나.’ 평정심의 상태, 5년 동안 요가를 하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 제길, 추락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평정심이라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추락은 실로 오랜만에, 행복감을 주었다. 무인도에 표류되었다. 신명을 바쳐 열심히 그린 그림에 물감을 쏟아버린 아이에게 주어진 새 종이, 무인도는 내게 새 종이였다. 새로 선물받은 세상에는 이전 세상에 있던 많은 것들이 없다. 무인도에 없는 것, 당연하게도 사람이다, ‘나를 보는 시선’이다. 반대로 이전 세상에는 없고.. 더보기
50년. 오늘 점심 메뉴는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평양식 냉면이다. ‘50년 전통’을 유난스레 자랑하는 식당이다. ‘50년 전통’이라, 이 조합이 어색하다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전통이라 하면 적어도 수백년을 기대하게 되는데, 고작 반백년을 두고 전통이라니. 그만큼 세상이 빠르다. 24세기쯤에는 ‘5년 전통’, ‘50년의 유구한 역사’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마치 입대하자마자 제대하는 것과 같다’는 4G LTE의 시대에, ‘시간’은 점점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인지, 오히려 점점 홀대를 받게 되는 것인지, 이런 것도 저런 것도 같다. ‘50년 전통’의 냉면을 맛보기 위해서는 보통 냉면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 외에도 지불해야 할 것이 더 있다. 시간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 육수 맛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