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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만남

이화여대 앞, 헤어샵. 나는 이화여대 앞에서 머리를 깎는다. '깎는다'는 표현은 의미나 어감 모두에 있어서 '머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의미상 머리카락이 더 적절하지만 머리카락은 분명 '자른다'와 궁합이 좋다.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부적절한 시기, 까까머리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아주세요"라고 말해왔으므로 이 표현이 입에 붙어버렸다. 그 때는 그게 맞더랬다. 잡초처럼 삐죽삐죽 삐져나온 덤불들을 제초기 돌리듯 전동바리깡으로 깎아내는 작업이, 헤어스타일링이었다. 처음 이화여대 앞의 난무하는 헤어샵들을 경험하고, 나는 이곳이 전국의 난다긴다하는 헤어디자이너들이 자웅을 가리는 프리미어리그쯤 될 거라고 생각했다. 갓 상경한 티를 내며 서울을 꿈의 무대 쯤으로 알고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 더보기
철벽녀도 쿨가이도 싫어 '철벽녀', '철벽남'이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철벽 안에 지키고 있는 게 도대체 뭘까요? 굳이 철벽을 깨부수고 싶은 마음도 안들어서 확인은 안했는데, 뭐 별거 있을까, 싶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도 아니고 철벽씩이나 둔다는 데, 이미 김이 팍 새버립니다. 사심없이 이야기나 하자고 말을 걸었는데, 이 짐승이 얻다대고 덤벼드나, 하는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면 정말 난처합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이미 엉덩이를 슬금슬금 뒤로 뺀다구요. 이런 제길, 당신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닌데, '너 따위에게 관심없다'는 확실한 의사를 미리 확인하게 되는 거, 그거 그리 유쾌하지 않아요. 아, 뭐 그렇다고 내가 여기저기 보이는 여자들에게 시덥지 않게 몇 마디씩 던져보는, 그.. 더보기
다를 수 있는 사람들마저 다를 수 없는 현실 화려한 프로필보다 당장의 고민이 그 사람을 더 잘 드러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면접보러 온 듯 공적인 프로필을 읊어대면, "그래서 요즘 고민이 뭐야?"라고 물어야 한다. 카이스트(KAIST) 학생들의 고민은, 달라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섞어서 물었다. 가뜩이나 시끄러웠던 카이스트 연쇄 자살 소동에, 나는 언론이 주목한 등록금, 학점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보다도, 그들만의, 그들이어서 가능한 실존적인 고민이 있지 않을까, 혐의를 두었었다. 나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이 글을 읽는다면, 여기서 그만두길.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다"고 말했으니까. 함께 중국 운남성을 여행하던 때에, 이 친구는 문학적 감수성과 정치-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나를 놀라게 했었다. '연구실의 박사'에게 뜨거운 가슴은 뭔.. 더보기
헤어져 각자의 운명을. 사람마다 느껴지는 기운이 다른데, 대개는 느껴지지 않을만큼 미미하다. 해로운 기운은 그나마 쉽게 알아본다. 사람이란 게 그만큼 약하고 민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기운을 만나기는, 적어도 나는, 어렵다. 형편없는 선구안, 무딘 감성 탓일지도. 그래도 이 친구에게서는 뭉퉁하고 뭉클하면서도 바위처럼 밀리지 않는 기운을 느꼈다. 그가 있는 자리는, 알게 모르게 그 부드럽고 묵직한 기운이 점점 차오른다. 자신의 길로 한 발 한 발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자기의 운명을 실현해가는, 의지의 한 걸음 두 걸음이 나는 인상깊었다. 그 행보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창조적인 일들을 만들어냈다. 우리 학교 교수님들과의 사적인 친분은 물론 국내 유명한 철학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다거나, 진지하고도 깊이.. 더보기
내 자식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겠어요? , 사랑하는만큼 서로에게 다가가고, 서로의 치부를 확인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심지어 미워하는 이들에게조차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치부는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이 만들어낸다. 사랑하는 이들은 정말로 나의 어떤 특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를 치욕스럽게 하는 이에게는 적의를 품게 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과 적의를 함께 키워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친구는 급기야, 결혼생활을 상상할 때는 핏빛으로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전쟁같은 사랑~♬' 굉장히 과격하구나, 놀랍게도 결말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자관계는 위험하다, 언제 동전이 뒤집힐 지 알 수 없다, 삼자관계가 완벽하다, 같은 사랑에 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