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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따까리들 (단상)

내 자식보다 하느님을 사랑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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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만큼 서로에게 다가가고, 서로의 치부를 확인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심지어 미워하는 이들에게조차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치부는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이 만들어낸다. 사랑하는 이들은 정말로 나의 어떤 특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이다. 나를 치욕스럽게 하는 이에게는 적의를 품게 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과 적의를 함께 키워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친구는 급기야, 결혼생활을 상상할 때는 핏빛으로 그려야 한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전쟁같은 사랑~♬' 굉장히 과격하구나, 놀랍게도 결말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아,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자관계는 위험하다, 언제 동전이 뒤집힐 지 알 수 없다, 삼자관계가 완벽하다, 같은 사랑에 참여하기 위해 결혼한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같은 대상을 함께 사랑함으로써 유지된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리로 왔을까,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되돌려보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살아있는 하느님이 아닌가, 로부터 가지를 뻗은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생각한 때가 있었지. 지금은... 조금 흔들린다. 어쨌든, 나는 별로 하느님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사랑하고 결혼할 수 있겠다는 건데, 친구는 내 생각이 핑크빛 환상이라 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아이는 어때? 아이를 낳으면 삼자관계가 되잖아. 같은 사랑에 참여하게 되고... 우리은 자기 자식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내와 나의 사랑을 더 완벽하게 하니까 말이야.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자식 때문에 산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탄식이 하느님에 대한 숭고한 사랑과 다른 점은, 그냥 스타일이 아닐까. 다소 투박하고 촌스러울지언정 본질은 같은 게 아닐까. 반드시 어렵고 복잡하고 심각하고 숭고해야 할까. 멋있어보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내 스타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좀 촌스럽구나, 그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내 자식보다 하느님을 사랑할까?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그렇다. 창세기 22장,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이야기. 그런 섬뜩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그냥 아브라함이 미친 놈이라 생각하고 촌스럽겠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