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 메뉴는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평양식 냉면이다. ‘50년 전통’을 유난스레 자랑하는 식당이다. ‘50년 전통’이라, 이 조합이 어색하다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전통이라 하면 적어도 수백년을 기대하게 되는데, 고작 반백년을 두고 전통이라니. 그만큼 세상이 빠르다. 24세기쯤에는 ‘5년 전통’, ‘50년의 유구한 역사’란 말이 어색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마치 입대하자마자 제대하는 것과 같다’는 4G LTE의 시대에, ‘시간’은 점점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인지, 오히려 점점 홀대를 받게 되는 것인지, 이런 것도 저런 것도 같다.
‘50년 전통’의 냉면을 맛보기 위해서는 보통 냉면의 두 배에 달하는 가격 외에도 지불해야 할 것이 더 있다. 시간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 육수 맛을 음미하고 앉아 있어야 하는 시간, 식초와 겨자로 국물 맛을 맞추기 위해 공들이는 시간. 다른 음식은 몰라도, 냉면만큼은 맛있고 오래된 식당일수록 천천히 나온다. 부산에는 밀면이라는 비슷한 종류의 음식이 있는데,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먹을 수 있다. 가격은 절반이지만 아마도 매출은 두 배가 넘을 것이다. 명동의 유명한 곰탕집도 똑같이 50년 전통을 자랑하지만 빨리 나온다. 외식업 매출의 핵심은 ‘테이블 순환’에 있는 것인데, 오래된 냉면집은 서두르지 않는다.
냉면, 조리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대놓고 말해서 별로 얹을 재료가 없는 음식이다. 육수 마실 시간을 줘 손님의 혓바닥을 미리 맞춰놓는다거나 얼음이 적절하게 녹는 시간을 기다린다거나 하는 간접적 시크릿 레시피(secret recipe)가 있을 거라고, 15분째 냉면을 기다리며 생각한다. ‘전통을 쌓은 냉면집일수록 기다리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이어가다 드디어 냉면이 나오면, 아줌마에게 타박하듯 “‘200년 전통’쯤 되면 1시간을 기다려야 겠네”하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오래된 냉면집은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의 시간에 저항한다. 흘러간 시간은 쿨하게 보내고 새로운 시간에 옮겨타서는 오늘의 영광이 없었을 것이다.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 오로지 한 길만을 50년 이상 지킨다. 빨리 냉면을 가져오라고 성미급한 손님이 소리를 질러도 차분히 얼음이 녹기를 기다린다.
놀랍게도 오래된 냉면집일수록 재료는 더 적어진다. 중국집 냉면은 다대기(다진양념)가 국물에 섞여 나오고, 저렴한 냉면집은 다대기가 면 위에 올려져 있어 덜어낼 수 있다. 동네에서 소문난 냉면집은 다대기를 별도의 양념통에 넣어 테이블마다 배치해두고, 50년 전통의 냉면집에서 다대기는 국물 맛을 해치는 주범으로 낙인찍혀 완전히 배제된다. 다대기 있냐는 질문에 종업원은 무시당했다는 듯 불쾌해하며 ‘냉면 먹는 법도 모르는 싸구려 입맛을 엇다 들이대?’하는 눈으로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비슷한 과정으로 삶은 계란, 배, 오이, 냉면무, 깨, 고기 등의 재료들이 점점 적어진다. 50년 전통의 냉면집에서는 삶은 계란 반쪽, 오이 한 조각, 배 한조각, 고기 두 점이 전부다. 그 여백은 국물맛과 면발의 힘으로 채워진다. 그래도 남는 여백은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다. 가격은 두 배가 되었는데 재료가 적게 든다니. 시간을 ‘전통’이라는 가치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걸려도 손님들은 ‘50년 전통’이라는 간판 앞에 줄을 선다.
사실 냉면맛의 뒤에는, 손님들이 경험하지 못한 더 많은 시간들이 있다. 만화와 영화 <식객>이 흥행하고부터 우리는 대충 알고 있다, 요리는 신선한 재료를 마련하는 것이 7할이라는 것, 재료와 양념, 육수 등을 준비하는 과정이 '맛'을 결정짓는다는 것. 조리과정은 요리에 있어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 맛있는 냉면의 이면에는 우선 최상급의 재료를 골라 육수를 끓이고 식히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적절함'을 찾기 위해 수만번의 실패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이 냉면만의 특별한 맛의 지점을 찾아냈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는 당당한 태도'는 아마도 이면에 감추어진 수많은 시간들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50년이 그렇게 쌓였더니 이런 맛이 난다. 시간을 맛볼 수 있다면 아마 50년 전통 냉면의 육수 맛이 나지 않을까.
맛있는 냉면을 둘러싼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흐른다. 촌스럽고 경박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돈이다”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깊은 통찰이 있는지도 모른다. “돈을 쫓지 말고 돈이 쫓아오게 만들어라”라는 말과 결합해보면 말이다. “시간을 쫓지 말고 시간이 쫓아오게 만들어라.” 싸구려 냉면집이 3일 전에 냉동시킨 삶은 계란으로 5분을 단축하려 할 때, 맛있는 냉면집은 손님을 앉혀놓고 육수를 맛보도록 한다. 5분을 벌기 위해 육수가 그토록 뜨거운지도 모른다. 맛있는 냉면집은 자신의 속도에 세상의 시간을 맞춘다. 그런 시간들은 흘러가는 다른 시간과는 달리 차곡차곡 쌓인다. 아마도 시간의 재질이 다른 것이다. 시간이 귀한 대접을 받아 재질이 바뀌는 것인지 아니면 홀대를 받아 그런겐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분명한 것은, 냉면집의 시간은 쌓이고, 냉면을 기다리고 있는 내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이다. 시간이야말로 내맘대로 쓸 수 있고, 또 내맘대로 써야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주어진 시간’,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유일한 것. 영화 <파피용>에서는 이런 명대사가 있었다. "시간을 낭비한 죄, 유죄!" 인생 50년 쯤 남았나, 이걸 한 번 쌓아올려야 되는데.... 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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