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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따까리들 (단상)

병신같은 글이라도 계속해서 써야 하는 이유

스타크래프트에는 '손속도'라는 측정치가 있거든. 

프로게이머라는 사람들이 개인용 키보드와 마우스를 들고 TV에 나타나서, 비장한 표정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미친 듯이 눌러댔잖아.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들은 알아.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심하게 눌러댈 필요는 없거든. 쇼맨십일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고 말지, 나도 그랬어. 우스꽝스럽다고까지 여겨지는, 약간의 비웃음이 지어지는 광경이었지. 

그런데도 프로게이머들의 '손속도'는 계속 더 빨라져만 갔어. 일반인들은 따라할래야 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갔지. 놀라운 건 '손속도'가 빠른 선수들이 승률을 높여갔어. '손속도'가 승률에 비례한다고까지 생각되기도 했어. '기준'같은 게 되고 있었어. 일반 게이머들도 너나 할 거 없이 자신의 '손속도'에 집착하기 시작했어. 나도 왠지 '손속도'가 실력향상으로 가는 지름길이겠다, 라고 생각했고 괜히 마우스를 빠르게 움직이고 한번 눌러도 될 키보드를 두 세번씩 눌러댔지. 그렇게 하면 '손속도'가 더 높게 나왔거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 게이머들도 '손속도'만큼은 프로게이머 수준까지 올라가게 됐지. 사실 어렵지 않잖아, 손을 빨리 움직이는 거. 웃긴 건 말야, 단순히 속도만 빨라서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다들 했던건지, 나중에는 '유효타수'라는 측정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어. 중복되거나 의미없는 움직임들은 뺀 수치였지. 어쨌든, '손속도'가 빠른 사람들도 많아졌고 나중에는 '유효타수'가 높은 사람들도 그만큼 많아졌어.

그 무렵, '임요환'이 대략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했어. "사실 초반에는 손을 빨리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갑자기 공격을 받거나 빠른 대응을 해야 할 때에 느린 손을 가지고 있지 않기 위해서는, 시작부터 손을 풀어놓고 있어야 한다." 그제야 프로게이머들에게 '손속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된 것만 같았지.


나는 결국 소설을 써야 할텐데. 쓰려야 쓸 것도 없다, 일이 바쁘다는 식의 핑계로 별로 쓰고 있지 않거든. 블로그에 써보는 작문들, SNS의 허세 섞인 트윗들마저 손을 놓아버렸어. 근데 잘 쓰려면 무조건 많이 써야 한대. 죽을 각오로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해야겠어. 허접한데다 허세까지 섞여있어서 도저히 눈뜨고는 못볼 것 같은 글들도 그냥 마구 써대려고 해. SNS든 블로그든 기획안이든 뭐든 닥치는대로. 프로게이머들이 단 한 번의 진짜 전투를 위해 '손속도'를 올리고 있는 것처럼 말야. <미생>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지. '잘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승부의 순간에 싸움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부족한 체력이다.' 장기간에 걸쳐 미리미리 근육을 길러놓아야 하는 거야.


그리고 얼마 후에 '강민'이라는 개성있는 게이머가 등장했지. 이 사람은 말야, 일반게이머들보다도 현저히 낮은 '손속도'로 스타리그 우승을 휩쓸었어. 정말 컴퓨터처럼 딱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고, 대신 굉장히 정교하게 움직였어. 유닛 하나하나를 귀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프로토스'라는 종족의 특성에 들어맞는 움직임이었지. 대단했어. '손속도'를 올리는 것 같은 그런 일들에 힘을 빼지 않는 게 경제적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강민은 손을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뇌를 움직였던 것 같아. 정교한 움직임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연습을 했을거고. 그리고, 어쨌든, 강민 이후의 '대표 프로토스'였던 '김택용'은 프로게이머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손속도'가 빠른 선수였어. 


정말이지 병인 것 같아. 그냥 쓰면 될텐데, 명분을 꼭 찾아야 해서 그래. 프로게이머가 미친듯이 마우스를 움직여대는 허세처럼, 내 SNS, 블로그의 글들도 비웃음을 살 것 같아서 말야. 연습이야 연습, 승부를 위한 연습. 그렇게 생각하자. 글을 쓰자. 닥치는대로.